1988년 파업은 당시 19명의 기관차 분회장 중 2명만이 참여한 평조합원 중심의 투쟁이었다. 그들은 열흘 농성 기간 중 스스로 요구 조건을 내걸었으며 상향식으로 지도부를 구성했다. 구속 11명이라는 피해가 나자 곧바로 ‘구속자 가족 후원회’를 결성했다. 8월 8일, 파업에서 복귀한 지 불과 열흘 만에 전국 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 후원회에는 전국의 기관차 승무원 중 90% 이상이 참여했다.
후원회 참여를 통해 파업 투쟁의 정당성을 확신한 기관차 승무원들은 1989년 철도노조 총선거를 맞아 적극 활동, 88년 파업에 등을 돌린 분회장들을 대부분 낙선시켰다. 대신 열심히 투쟁한 평조합원이나 후원회 대표들이 대거 분회장으로 당선되었다.
1989년 5월 15일, 88년 파업 투쟁의 성과와 후원회 활동의 성과를 바탕으로 전국기관차지부협의회(약칭 전기협)가 설립되었다. [전기협은 분회장협의회로 시작해 분회협의회로 발전하고, 이후 철도노조 조직체계의 변경으로 분회가 지부로 바뀌면서 지부협의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전기협은 설립 초기 기관차 분회장들의 회의체로 구성되었지만 1991년에는 기관차 승무원들이 회원으로 가입하는 대중조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는 어용 철도노조 집행부를 대신해 기관차 조합원 대중들이 스스로 자주적인 조직을 결성하여 노동조건을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었다.
전기협은 창립 첫해인 1989년 7월 26일 “7.26 파업 투쟁 1주년 기념 토론회”를 개최하여 88년 파업 투쟁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이 같은 행사는 1994년 파업 때까지 매년 이어졌으며 나중에는 대동제 등으로 발전했다.
전기협은 또한 폭발적인 준법투쟁을 통해 노동조건을 개선하기도 했다. 1990년에는 전의역 열차 추돌사고로 부산기관차 정민효 기관사가 사망하자 이에 대한 장례투쟁을 조직했으며, 그해 12월에는 서선원(청량리기관차지부 교선부장) 전기협 사무처장을 철도청이 파면하려 할 때 파업 투쟁 일보 직전까지 가며 파면을 저지하기도 했다.
이 같은 투쟁을 통해 전기협은 기관차 승무원들의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근무환경을 개선하면서 기관차 사무소 조합원 대중들에게 지도력을 강화해 나갔다. 전기협은 산하 지부 간부들의 교육을 통해 조직력을 강화했으며 설문조사, 신문사업 등 단위노조에 준하는 활동을 펼쳤다. 1992년부터는 직선제 규약개정을 주장하며 대의원대회 때마다 철도노조 집행부 측 대의원들과 충돌하기도 했다.
전기협은 활동이 기관차 승무원 위주로 전개되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1994년부터 기관차 검수원들을 적극적으로 조직했다. 이 같은 활동에 힘입어 1994년 6월 파업 직전에는 조직력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으나 파업의 강제 폭력 진압 이후 강제해산 당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