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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년 전국기관차지부협의회(전기협)의 결성과 활동

    전국기관차협의회(전기협)는 1988년 파업 투쟁 이후 1989년 5월 15일 결성됐다. 철도노조가 노조의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하고 오히려 철도청과 정부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철도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조합원들이 주체가 돼서 결성했다.

    목차
    1. 개요
    2. 1988년 기관사 파업 이후
    3. 전국철도노동조합의 어용성
    4. 전국기관차협의회(전기협) 결성
    5. 주요 활동 일지
    6. 결과와 의미

    2. 1988년 기관사 파업 이후

    1988년 7월 26일 기관사 파업 이후 교통부는 8월 23일 △노동시간 최고 18시간에서 14시간 이하로 조정 △정기휴일 부여 △근로기준법 적용한 수당 단가 인상 등을 발표했다. 그러나 전국을 뒤흔들었던 파업의 충격이 가시자 기관사를 비롯한 철도노동자들에게 했던 세 가지 약속은 휴짓조각이 됐다. 1988년 이후 1994년까지 노동시간은 여전히 24시간 연속 노동의 변형근로시간제 아래 360시간이 고수되고 있고, 유급 휴일은 어느 직종을 불문하고 단 하루도 없으며, 휴일수당으로 대체되는 연 15일의 법정공휴일도 일요일과 겹치면 수당조차 지급하지 않았다. 연장근로·휴일·야간근로 등 모든 초과근무 수당 단가는 근로기준법의 50%에 머물러 있었다.

    3. 전국철도노동조합의 어용성

    전국철도노동조합(철도노조)은 어용과 관료주의의 표본이었다. 1988년 파업 투쟁 당시 철도노조 집행부는 비번을 이용해 열흘간 농성을 벌이던 기관사들에게 찬물 한 그릇 대접하지 않았다. 그 후 집행부가 농성자들을 진압한 경찰의 밥값으로 조합비를 1천만 원 이상 지출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또 당시 집행부는 TV에 출연해 “기관사들의 파업은 불법이라 집행부로서도 용납할 수 없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노동조합법에 따르면 ‘해고의 효력을 다투는 자는 조합원의 자격이 있다’고 명시돼 있으나 당시 집행부는 김창한, 채주영, 이태균 등 파업지도부가 철도청의 징계로 파면되자마자 절차도 없이 조합원 명부에서 삭제해버렸다. 또 철도노조 단체협약 중 임금과 노동조건 등 중요한 부분은 모조리 ‘관계 법령에 의한다’고 명시돼 있었다. 철도노조의 단체협약 갱신은 곧 공무원법, 공무원 복무규정이나 철도청 수당 규정, 근무수당 규정이 개정되면 그대로 문구를 수정하는 절차에 불과했다. 임금교섭도 한 차례도 하지 않았다. 철도노조 역사상 임금교섭을 한 것은 기관사들의 파업 투쟁이 있었던 1988년과 파업 일보 직전까지 갔던 1990년 12월 투쟁 이후 수습을 위한 것뿐이다. 이외의 모든 안건은 노사협의회에서 “검토한다”, “노력한다”, “추진한다”는 약속만 반복해 왔다.

    4. 전국기관차협의회(전기협) 결성

    전국기관차협의회(전기협)는 1988년 파업 투쟁 이후 1989년 5월 15일 결성됐다. 철도노조가 노조의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하고 오히려 철도청과 정부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철도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조합원들이 주체가 돼서 결성했다. 전기협은 전국의 기관사 5,200여 명과 검수원 3,000여 명, 그 외 500여 명 등 총 8,700여 명으로 구성됐고, 이 중 1994년 당시 전기협에 가입한 회원은 6,500여 명이었다. 약 74% 정도가 기관사, 검수원 등이었는데 이들을 제외하면 중간 관리자와 사무원 등뿐이어서 실제로 기관차를 운전하고 정비하는 노동자들은 대부분 가입했다고 볼 수 있다. 전기협은 의장과 집행위원회로 구성된 중앙 지도부와 철도노조의 합법적인 하급 현장 조직인 전국의 20개 단위지부로 구성됐다. 20개 지부는 철도노조의 공식 조직이며, 전기협은 비공식 단체였다.

    5. 주요 활동 일지

    • 전국기관차 분회장 협의회 창립 : 분회장들의 회의체로 활동. 초대 의장 김대일 청량리기관차분회장

    • 기관지 ‘기적’ 창간

    • 부산기관차 정민효 동지 장례투쟁

    • 7·26 파업 투쟁 1주년 기념행사 개최하고 1993년까지 매년 개최함

    • ‘부당징계 철회와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준법투쟁’ 당시 서선원 전기협 사무처장의 파면 저지

    • 전기협 회원 모집하여 대중조직으로 전환, 집행위원회 구성

    • 승진차별 철폐 투쟁 불발. 개봉역 추돌사고로 인한 논란 끝에 투쟁 정리

    • 최경집 2대 의장 취임

    • 유광배 3대 의장 취임

    • 서선원 3대 의장 취임

    • 8개 항 관철을 위한 노동조건 개선 투쟁

    • 전국지하철노동조합협의회 공동파업 투쟁

    • 파업 와해 과정에서 전기협 강제해산

    6. 결과와 의미

    1988년 파업은 당시 19명의 기관차 분회장 중 2명만이 참여한 평조합원 중심의 투쟁이었다. 그들은 열흘 농성 기간 중 스스로 요구 조건을 내걸었으며 상향식으로 지도부를 구성했다. 구속 11명이라는 피해가 나자 곧바로 ‘구속자 가족 후원회’를 결성했다. 8월 8일, 파업에서 복귀한 지 불과 열흘 만에 전국 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 후원회에는 전국의 기관차 승무원 중 90% 이상이 참여했다.

    후원회 참여를 통해 파업 투쟁의 정당성을 확신한 기관차 승무원들은 1989년 철도노조 총선거를 맞아 적극 활동, 88년 파업에 등을 돌린 분회장들을 대부분 낙선시켰다. 대신 열심히 투쟁한 평조합원이나 후원회 대표들이 대거 분회장으로 당선되었다.

    1989년 5월 15일, 88년 파업 투쟁의 성과와 후원회 활동의 성과를 바탕으로 전국기관차지부협의회(약칭 전기협)가 설립되었다. [전기협은 분회장협의회로 시작해 분회협의회로 발전하고, 이후 철도노조 조직체계의 변경으로 분회가 지부로 바뀌면서 지부협의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전기협은 설립 초기 기관차 분회장들의 회의체로 구성되었지만 1991년에는 기관차 승무원들이 회원으로 가입하는 대중조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는 어용 철도노조 집행부를 대신해 기관차 조합원 대중들이 스스로 자주적인 조직을 결성하여 노동조건을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었다.

    전기협은 창립 첫해인 1989년 7월 26일 “7.26 파업 투쟁 1주년 기념 토론회”를 개최하여 88년 파업 투쟁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이 같은 행사는 1994년 파업 때까지 매년 이어졌으며 나중에는 대동제 등으로 발전했다.

    전기협은 또한 폭발적인 준법투쟁을 통해 노동조건을 개선하기도 했다. 1990년에는 전의역 열차 추돌사고로 부산기관차 정민효 기관사가 사망하자 이에 대한 장례투쟁을 조직했으며, 그해 12월에는 서선원(청량리기관차지부 교선부장) 전기협 사무처장을 철도청이 파면하려 할 때 파업 투쟁 일보 직전까지 가며 파면을 저지하기도 했다.

    이 같은 투쟁을 통해 전기협은 기관차 승무원들의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근무환경을 개선하면서 기관차 사무소 조합원 대중들에게 지도력을 강화해 나갔다. 전기협은 산하 지부 간부들의 교육을 통해 조직력을 강화했으며 설문조사, 신문사업 등 단위노조에 준하는 활동을 펼쳤다. 1992년부터는 직선제 규약개정을 주장하며 대의원대회 때마다 철도노조 집행부 측 대의원들과 충돌하기도 했다.

    전기협은 활동이 기관차 승무원 위주로 전개되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1994년부터 기관차 검수원들을 적극적으로 조직했다. 이 같은 활동에 힘입어 1994년 6월 파업 직전에는 조직력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으나 파업의 강제 폭력 진압 이후 강제해산 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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