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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년 신군부 정화조치와 철도노조

    1979년 12.12 군사반란에 이어 1980년 5.17 비상계엄 확대를 통해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정권이 5.18 광주 민중 학살과 더불어 폭력을 바탕으로 사회를 통제했다. 신군부는 당시 촉발된 노조 민주화와 생존권 투쟁을 잠재우기 위해 ‘사회안정과 부패 척결’을 내세우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이하 국보위)와 중앙정화위원회 주도로 ‘노동계 정화조치’를 진행했다. 이에 따라 ‘노조 간부 사퇴, 지역지부 해체와 노조 통합’ 등을 강제적으로 진행했다. 정화대상자였던 김종욱 철도노조 위원장도 8월 20일 사퇴했다. 철도노조는 8월 21일, 25일 두 차례 의장단 회의를 통해 직무대행을 연속 교체했는데 이러한 일련의 불법적 과정에 대해 저항이나 반발 없이 신군부의 노조 관리와 통제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같은 해 12월 전두환 정권은 노동관계법 개악을 통해 기업별노조 체제를 확립하고 노조 결성부터 교섭, 쟁의까지 악법 조항을 만들어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노동조합 활동을 사실상 금지하고 이에 저항한 민주노조를 잇따라 파괴했다.

    목차
    1. 개요
    2. 배경
    3. 경과
    4. 결과와 의미

    2. 배경

    10.26 사태 이후 1980년 초 노동자들의 요구가 폭발적으로 분출했다. 장기 군사독재가 마감함에 따라 각종 민주적 제 권리와 생존권 요구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 반영된 것이다. 1970년대 중후반 연간 평균 100여 건에 머물던 노동쟁의가 1980년 상반기에만 407건(대부분 5.17 계엄 확대 조치 이전)으로 급증했다. 한편 노조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확산되어 1월부터 한국노총 위원장 사퇴를 촉구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4월 25일에는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27명이 한국노총 위원장실을 점거해 ‘해고자복직, 노동3권 보장’을 요구했으며 5월에는 한국노총 금속노조 9개 분회가 한국노총 남서울지역 사무실을 점거하고 금속노조 대의원대회에서는 ‘금속노조민주화운동투쟁위원회’가 위원장 사퇴를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한국노총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간부, 조합원들을 통제 관리하고자 5월 13일 여의도 노총 강당에서 ‘노동기본권 확보 전국 궐기대회’를 소집했는데 이날 모인 2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한국노총 민주화를 요구하며 ‘지도부 총사퇴와 제명, 노동3권 완전 보장,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농성은 3일간 지속되다 5월 15일 자진 해산했는데, 곧바로 5.17 군사계엄 확대와 함께 노동계 정화조치를 통한 전두환 정권의 민주노조 탄압이 본격화되었다.

    3. 경과

    • 한국노총에 ‘노동조합 5대 정화지침 전달’이라는 노동청장의 공문이 발송되었다. 5대 지침은 ‘1) 부당치부, 재산축적자의 재산 환수 2) 한국노총 산하 12명의 산업별 위원장의 임원직 자진 사퇴 3) 지역지부 폐지 4) 운수노조와 항만노조 통합 5) 각 노동조합에 정화위원회 구성’의 내용을 담았다. 이 지침에 따라 ‘한국노총 정화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위원장에 한국노총 사무차장이 임명되었다. ‘한국노총 정화추진위원회’는 1차 정화조치로 김영태 한국노총 위원장 겸 섬유노조 위원장과 12명이 산별노조 위원장들을 어용노조 간부로 지목해 ‘부정축재, 노사분규 야기, 호화생활’ 등의 명목으로 자신 사퇴케 했다. 또한 전국 지역지부 114개를 해체함으로써 중소 영세사업장의 노조 결성과 운영은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당시 ‘중앙정화위원회’에서는 5대 지침 외에 세부 실천 사항으로 12개 항의 정화대상자 선정기준을 시달했고 그 내용 중 ‘(7) 10.26 이후 조직분규를 획책하거나 사회안정을 파괴한 자 (8) 외부세력에 영합한 자’를 정화대상으로 했는데, 한국노총과 단위사업장 노조 민주화에 적극적인 간부들을 대상으로 삼아 노동운동을 봉쇄하기 위해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 ‘노동조합 정화지침 보완’이라는 공문을 통해 ‘조직분규와 반조직행위 금지, 지역지부 폐지와 보고 시기 강제, 상급단체 파견 금지, 일정 기준 이하 노조 임원 자격 박탈과 사퇴, 조합비와 각종 기금 사용에 대한 노동청 관리 감독 아래 관리와 허가 후 사용’ 등을 통해 노동조합을 준행정기구로 전락시켰다.

    • 2차로 노조 간부 191명(정화대상자 121명, 자진 사퇴자 70명)에 대해 강제 사표를 쓰도록 해서 일선 노동운동에서 배제해 버렸다. 이들은 대부분 한국노총 민주화와 농성을 주도했거나 개별기업에서 강력한 단체행동을 추진했던 일선 지부장, 분회장 및 상집간부, 대의원들이었다.

    • ‘정화된 노동조합 간부의 노조활동 금지 지침’을 발표해 정화된 노동조합 간부들이 노동조합 활동을 재개하거나 사업장 노조 간부들을 접촉할 수 없도록 지도해 정화된 사람들이 생산활동에만 전념하도록 지도하라고 지시했다. 그리하여 이때 정화된 사람들로 하여금 3년간 노조 간부를 할 수 없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1980년 12월 노동법을 개악할 때에는 이러한 사항을 법조문으로 명문화하기까지 했다.

    • 노동청이 ‘노동조합 운영지침’을 각급 노동조합에 시달했는데 그 주요 내용은 ‘전임 임직원 수 제한, 노동조합 예산편성 및 집행, 산별 지역별 연락 협의기구 설치 운영, 노조 정화조치에 따른 보완조치, 사업장 단위노조의 운영 정상화 방안’ 등에 관한 것이었다.

    4. 결과와 의미

    전두환 정권은 출범 초기부터 노동조합운동을 전면 금지하고 노동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그 방향은 기존 어용노조 간부의 청산과 민주노조의 파괴 그리고 노동관계법 개악을 통한 제도적 통제 강화였다. 정화조치 대상자로 지목된 민주노조 간부들은 정화조치에 대해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사퇴를 거부하였지만 상급단체와 회사로부터 보복을 받아 해고되거나 구속 수배되었다. 이어 보안사는 민주노조 파괴작업을 개시했고 이를 위해 7월과 12월 노동운동가들을 강제로 대량 연행하고 이들에게 가차 없이 협박과 폭행을 가하여 사표를 받았으며 그중 일부를 삼청교육대로 끌고 가 혹독한 형벌을 가했다. 한편 지역지부 해체를 통해 조합원은 14만 명이나 급감했다.

    정권은 1980년 12월 31일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 노동위원회법을 개정하고 노사협의회법을 새로이 제정, 공포했다. 노조 결성에서부터 조직 형태, 조직 운영, 단체교섭, 노동쟁의에 이르기까지 광범하게 노동운동을 억압하는 내용으로 채워졌는데 ‘기업별 노동조합의 강제, 제3자개입금지 조항의 설치, 노조설립요건의 강화, 단체교섭권의 위임금지, 단체협약 유효기간의 연장, 냉각기간의 연장, 노조 운영에 대한 행정개입 확대, 노조 간부의 경력과 노조비 사용 제한, 공익사업 범위 확대, 직권중재 대상 확대, 노사협의회법의 신설’ 등의 내용이었다. 이밖에 전두환 정권은 노동대책회의 설치, 블랙리스트 배포, 위장취업자 축출,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반공이데올로기 공세 등을 통해 노동운동을 탄압하였고 기업은 권력의 비호 아래 노동자들을 강력한 통제 아래 묶어두고 부당노동행위를 통해 노조 활동을 봉쇄했다.

    이에 따라 노동운동은 극심한 침체국면에 접어들었다. 조합원 수가 1980년 초 100만여 명에서 70만 명 수준으로 급락했고 노동쟁의도 급감해 1982~1983년 2년 동안 45건에 불과했다. 파업은 단 한 건도 없었다. 또 노동부가 발표한 노사분규도 1980년 407건에서 1981년 186건, 1982년 88건으로 급속히 감소했다. 그러나 한국노총과 소속 산별노조들은 아래로부터의 민주화와 개혁 요구는 철저히 외면했고 군사정권의 반노동 정책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저항 없이 무기력하게 각종 조치를 따르거나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행태로 일관했다.

    철도노조는 이와 같은 노동계 정화지침에 적극 협력했다, 8월 5일 위원장, 부위원장, 사무국장이 국보위를 방문하여 철도노조의 현황을 보고했다. 그럼에도 국보위는 김종욱 철도노조 위원장을 정화대상자로 조치함에 따라 위원장은 8월 20일 사퇴했다. 철도노조는 다음 날인 8월 21일 12시 의장단회의를 개최하여 지윤성 부위원장을 위원장직무대리로 선출했으나 4일만인 8월 25일 08시 30분 또다시 의장단회의를 개최해 박준홍 부위원장을 위원장 직무대리로 선출했다. 9월 6, 17, 18일 3차례 한국노총 중앙정화위원회가 개최됐고 이튿날인 9월 19일에는 철도노조 부위원장 지윤성, 총무부장 이병학, 조사부장 조남식, 순천지부장 한항연이 중앙정화위원의 정화대상에 포함되어 사임했다. 철도노조 직무대행체제는 1982년까지 이어졌다. 철도노조는 5월 중 열던 정기대의원대회를 3개월여 앞당겨 1982년 2월 18일에 열고 단독 입후보한 박준홍 직무대행을 재적 대의원 109명 중 106명의 찬성으로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한편 이날 정기대의원대회 결의문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복지사회 건설을 최우선적으로 추진하는 정부의 의지적 정책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참고자료

    박승옥, ‘80년대 노동조합운동의 새로운 출발’, 전태일기념사업회 편, ‘한국노동운동20년의 결산과 전망', 세계, 1990, p78

    동아일보 1980.1.21.

    노동자역사한내, 노동운동사건사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발간위원회, ’전노협백서' 제1권

    안승천, ‘한국노동자운동, 투쟁의 기록', 박종철출판사, 2002, p64

    철도노조, 철도노조 5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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