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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1년 대한노총, 철도연맹 강제 해산과 전국철도노동조합, 한국노총 출범

    1961년 5월 16일 육군 소장 박정희를 중심으로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일부 군인들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제2공화국 장면 정부를 전복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군사정부는 4.19 혁명 이후 확대된 제반 민주주의 권리를 무력으로 짓밟고 폭력에 기반한 통치 조치를 취했다. 노동 현장에서는 군사정부 포고령에 따라 대한노총과 전국철도노동조합연맹이 5월 23일 이후 강제 해산되었다. 이어 6월 창설된 중앙정보부가 주도해 ‘기존 노동조합의 해체, 산별노조 체제로의 재편, 정치활동의 금지, 복수노조의 금지’를 핵심으로 하는 노동정책을 관철하기 위해 노동조합 조직을 강제 재편했다. 이에 따라 8월 30일 창립대회를 통해 11개 산별노조로 편성된 한국노동조합총연맹(현재 한국노총)이 만들어졌다. 철도노동조합연맹 산하 10개 노조도 단일산업별노조 건설 방침에 따라 통합되어 8월 17일 ‘전국철도노조’로 출범했다.

    목차
    1. 개요
    2. 경과
    3. 결과와 의미

    2. 경과

    1) 대한노총 해체와 한국노총 출범

    1959년 대한노총의 어용 행각에 실망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민주화 요구가 분출되기 시작해 1959년 8월, 대한노총에 반대하고 민주노조를 지향하는 세력들이 모여 새로운 민주적 노동단체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국노협)를 구성했다. 전국노협(준)의 발표에 따르면 전국 541개 노조, 27만 명 중 311개 노조, 14만 명이 전국노협 참가를 결의했다. 같은 해 10월 전국노협은 결성대회를 했지만, 이승만 정권의 탄압과 대한노총의 방해로 합법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1960년 4․19혁명과 자유당의 몰락으로 대한노총이 해체되었으나 전국노협은 노동대중들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데 실패해 대한노총을 중심으로 제기되기 시작한 ‘총단결’ 요구에 밀렸고, 대한노총과 통합해 한국노동조합연맹(한국노련)을 출범시켰다. 4.19 혁명 이후 노동 현장은 민주주의 열망으로 가득했고 노조 조직률이 1959년 말 559개 노조, 28만 명이었던 것이 1960년 말에는 914개 노조, 32만 명으로 늘어났다. 중소기업은 물론 언론, 은행, 교원 등 화이트칼라 노동자들도 노동조합을 설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은 이미 설립되어 있던 모든 노동조합을 해산시키고 ‘국가재건최고위원회 포고령 제4호’(정당을 포함해 사회단체 등의 모든 정치활동을 불법으로 규정)를 발령했다. 6월 설립된 중앙정보부는 이후 노조 재편의 임무를 담당할 핵심 세력으로 각 산별조합의 대표 9명을 지명하고, 8월 4일 이른바 ‘9인위원회’로 알려진 ‘한국노동단체 재건조직위원회’(재건위)를 구성했다. 재건위는 8월 6일과 8월 9일 두 차례의 회합을 통해 15개 산별노조의 조직 책임자들을 임명했고, 8월 12일 재건위 총회를 통해 ‘재건조직 기본방침’을 채택하여 산별노조의 재건 작업을 지휘했다. 그 결과, 8월 16~25일 사이에 11개의 산별노조(철도, 섬유, 광산, 외기, 체신, 운수, 해상, 금융, 전매, 화학, 금속)가 재조직되었고, 8월 30일 산별노조들의 대의원 78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대회를 개최하고 한국노총을 출범시켰다.

    2) 철도노동조합연맹의 해체와 전국철도노조의 출범

    철도노동조합연맹도 1961년 5월 23일 국가재건위원회 포고령에 따라 강제 해산되었다. 이후 ‘한국노동단체재건조직위원회’의 ‘산별노조로의 재건조직 기본방침’에 따라 기존 철도노동조합연맹 산하 10개 지역별, 공장별 노조가 하나의 단위노조인 ‘전국철도노동조합’으로 재조직되었다. 철도노조는 1961년 8월 17일 용산 철우회관에서 결성대회를 치렀다. 이날 결성대회는 전국 대의원 53명이 참석한 가운데 선언, 강령 채택과 규약 통과, 예산 심의를 거쳐 위원장 선거를 진행했는데 4.19 혁명 이후 부패와 매수 혐의로 쫓겨난 이규철 전 철도노동조합연맹 위원장이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전국철도노동조합은 산하 11개 지부, 180개 분회를 두었다. 이어 8월 28일 각 지부조직 책임자를 소집해 지부 분회조직 요강을 정하고 하부조직 결성에 관한 회의를 진행한 이후 9월 초순부터 지부 정돈에 착수해 당해 12개 지부가 결성됐다. 조합원 총수는 21,756명이었다. 폐기되었던 단체협약은 이듬해인 1962년 4월 17일 전문 54종의 내용으로 체결되었다.

    한편 결성대회에서 채택한 대회결의문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백척간두에 선 조국의 위기를 구출한 5.16 혁명의 당면과업을 수행하고자 총진군하고 있는 이때 ... 오로지 혁명정신에 입각한 순수한 노동조합을 재건하기 위한 성스러운 결성대회에 즈음하여 다음과 같이 엄숙히 결의한다. 우리들은 반공체제를 강화하고 근로정신을 고취하여 산업발전에 이바지한다. ...”

    3. 결과와 의미

    5·16 군사쿠데타는 노동운동을 둘러싼 제반 상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군사정부는 1960년 4.19 혁명 이후 제2공화국 하에서 크게 확장되었던 제반 민주주의 권리와 요구를 무력으로 짓밟고 자신들이 원하는 새로운 형태의 노동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1961년 5·16으로부터 8월 초순까지 취해진 군사정부의 노동조합 관련 정책1)의 핵심은 ‘기존 노동조합의 해체, 산별체제로의 재편, 정치활동의 금지, 복수노조의 금지’ 등으로 압축되었다. 이와 같은 정책은 1963년 ‘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 ‘노동위원회법’ 개정을 통해 박정희 군사정부가 설계한 노동조합 체제로 법적 완성을 이루게 된다.

    한편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로 인해 기존 노동조합들은 강제로 해체되었고 이에 불만을 표명한 노조 지도자들은 체포·구속되었다. 이로써 4.19 직후 크게 활성화되었던 민주적 노동운동은 국가 통제에 따라 활동이 중단되었다. 그 자리를 중앙정보부 주도 아래 만들어진 한국노총 총연합단체와 11개 산별노조가 메웠는데, 군사정부는 이들 조직에 자유당 정권 시절 준국가기구의 역할을 했던 ‘관제어용노조’의 역할을 또다시 강제했다.

    군사정부의 폭력을 바탕으로 한 노조 강제 해산과 재편 과정은 반민주적인 폭거였다. 특히 ‘사회정화와 부패 일소, 정의 실현’을 쿠데타의 목적으로 내세웠지만, 자유당 정권 시절 대한노총과 철도노동조합연맹 어용 지도부를 재차 등용시켰으니, 말뿐인 구호임을 스스로 보여줬다. 한국노총의 초대 위원장이자 철도노조의 초대 위원장이 된 이규철은 자유당 정권 시절부터 대전철도국노조 위원장, 철도노동조합연맹 위원장을 지냈고 5.16 쿠데타 이후에는 ‘9인위원회’ 멤버로 군사정권의 시책에 앞장섰다. 또한 노동관계법을 개악해 노동3권을 제한하고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조 활동 자체를 봉쇄, 통제했다. 대한노총과 철도노동조합연맹 어용 간부들은 일절 저항 없이 군사정부에 순응하며 체제 협조자 역할을 했다. 결성문과 강령으로 확인되듯이 전국철도노동조합은 결성 이후 2001년 민주집행부 탄생 이전까지 40년 어용노조의 길을 걷게 된다.

    1) 최초의 조치는 1961년 5월 19일에 발표된 계엄사령부 공고 제5호 ‘경제질서 회복에 관한 특별성명서’로, “노임은 5월 15일의 수준으로 유지하고 노동쟁의는 일절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이어 5월 21일, 군사정부는 ‘포고령 제6호’를 통해 노동조합을 포함한 모든 정당·사회단체들의 즉각적인 해체를 명령했다. 그리고 8월 3일,‘ 사회단체 등록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여 노동단체의 역할을“노동조건의 개선”과 “경제적·사회적 지위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자율적인 경제조직으로 한정함으로써, 노동단체의 정치활동을 금지할 것임을 명확히 했다. 아울러, 같은 날 군사정부는‘근로자의 단체활동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공포하여 기존의 노조 설립에 있어서 ‘신고주의’를 사실상 ‘허가주의’로 전환시켰다. 또한 8월 4일 보건사회부 장관은 ‘근로자의 단체활동에 관한 임시조치법 공포에 제하여’라는 담화문을 통해, 향후 노동조합의 재편은 “전국 단일 산별노조”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표명함으로써 복수노조 체제를 허용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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